EU정상회의, 대서양동맹 위기에 역대급 열기…결정적 한방 없어

[르포] EU정상회의, 대서양동맹 위기에 역대급 열기…결정적 한방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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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건 아마 처음인 것 같다.”

17년째 EU를 출입하고 있다는 유럽권 매체의 한 기자는 6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EU 특별 정상회의장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언제나 유럽에 위기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논의만 하다 끝난 경우가 많았다”며 “그런데 이번 내놓은 ‘재무장 계획’을 한 번 봐라. 정말 다급하다는 신호”라고 견해를 밝혔다.

그가 언급한 ‘유럽 재무장 계획’은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가 이번 정상회의를 앞둔 4일 제안한 긴급 조처다.

회원국들이 부채 한도 걱정 없이 국방비를 증액할 수 있도록 EU 재정준칙 예외조항을 발동하고, EU 예산 여유분을 담보로 무기 공동조달 대출금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를 통해 8천억 유로(약 1천229조원)에 달하는 자금 동원한다는 구상이다.

정상들은 이날 회의에서 재무장 계획에 지지 입장을 표명했으며,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오는 21일 열리는 EU 정례 정상회의 전 구체적 입법안을 내놓겠다고 예고했다.

통상 집행위 제안이 실제 입법안 형태로 나오는 데만 해도 수개월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히 전례없는 속도라고 할 수 있다.

경제 공동체이자 자체 군사력이 없는 EU 차원에서 군사자금 조달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그간 ‘금기’에 가까웠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결국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안보에서도 발을 빼려는 듯한 태도를 노골화하면서 유럽 전역을 덮친 위기감을 방증하는 셈이다.

회의 현장 곳곳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EU 고위 당국자는 회의 시작전 기자들과 만나 “유럽 안보의 새로운 장을 여는 날”이라고 여러 차례 힘줘 말했고, 회의장에 속속 도착한 정상들은 앞다퉈 ‘자강 안보’ 필요성에 한 목소리를 냈다. “시간이 없다”는 표현도 적지 않게 나왔다.

27개국 만장일치로 채택된 공동성명은 “전반적인 대비 태세를 강화하고, 전략적 의존성을 줄이며 (회원국간) 중요한 역량 격차를 해소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회의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억지력을 구축하고 우리 시민들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가 약속한 것을 이행하려는 것”이라며 “EU는 단호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취재진 규모도 ‘역대급’이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도착했을 때는 안전 요원들의 제지에도 순식간에 취재진이 몰리면서 이동 통로마저 막혔다.

각국 정상들의 도어스테핑(약식 문답)이 이뤄져 ‘명당’으로 꼽히는 약 600석의 메인 프레스룸도 전날부터 ‘선점’ 경쟁이 치열했고, 메인 프레스룸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도 빈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현장에서는 인접 국가에서 항공편으로 도착해 수화물을 통째로 들고 온 취재진도 적지 않게 보였다.

EU 대변인실의 한 관계자는 “자동으로 취재허가를 받는 상시 출입기자까지 포함해 약 1천300명 정도가 사전 등록을 했다”며 “실제로 몇 명이 왔는 지까지는 파악이 어렵지만, 근래 열린 정상회의 중 가장 많이 온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유럽 전역의 이목이 집중됐으나 결정적 한 방은 없었다.

특히 EU는 미국의 우크라이나 군사지원 중단 직후 열린 이번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단합된 결의’를 보여주려 했으나, 헝가리가 끝내 거부해 공동성명과 별개의 ‘별첨 문서’로 입장문이 발표됐다.

정상들은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친러 성향인 슬로바키아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대신 26개국 입장문에 ‘러시아산 가스 운송 문제에 대한 실행 가능한 해결책 모색’이 슬로바키아에 대한 ‘당근’으로 제시됐다. 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가 자국 가스관을 통한 러시아산 가스의 유럽 공급을 중단하자 강하게 반발해왔다.

까다롭고 복잡한 EU 의사결정 구조로 인한 한계를 또 한 번 드러낸 셈이다.

향후 회원국의 국방비 증액을 위한 EU 후속 조처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이견이 예상된다.

특히 조약상 한계로 집행위의 자금조달 계획이 사실상 전액 대출에 의존하는 형태여서 각국 재정 상황에 따라 선호도가 갈릴 수 있다.

공동성명에도 EU 자금 계획 이행 시 “회원국에 대한 동등한 대우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단서가 달렸다.

집행위의 계획이 실제 효과를 발휘하려면 결국은 개별 회원국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증액에 나설 지가 관건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날 유럽의 방위에 관한 11시간 마라톤 회의가 열리는 동안 대서양 반대편에선 또 한번 유럽을 향한 경고 메시지가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취재진과 문답 과정에서 거듭 유럽의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며 “나토 국가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나는 그들을 방어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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